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Miscellanea

[간추린 대한민국 정치사]_(저자 김영명)

by Good safety 2023. 9. 16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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말그대로 대한민국 정치사를  간추린 책입니다. 저자는 김영명입니다.
어느 정도 현대사에 대한 지식과 정치적 사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아래에 간단한 요약만 봐도 이해할 것으로 봅니다.
자세한 내용은 서적의 본문을 읽어보기 바랍니다.


<해방과 분단>
- 신탁통치안
- 모스크바협정(미영소 삼상회의)
- 민족 신탁 반대, 사회 신탁 찬성
-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소련봉쇄주의자
- 트루먼 행정부 미군주둔 의지
- 미국 트루먼 독트린
- 소련 즈다노프 선언
- 소련 생각 - 소미 동시철수 남북한 총선거 공산화
- 미국 생각 - 남한 단독 정부 한반도 공산화 반대
- 임정 몰락(미군정의 인정X, 임정중심 무모한 목표)
- 한민당(우파, 친일기반, 미군정의 지원, 좌파저지)
- 이승만(사회개혁X, 통일X, 친정 반공국가 원함)
- 이승만은 분쟁의 중심, 좌우 통합 지도력 부족
- 여운형
- 박헌영
- 해방 이후 임정은 미군정 인정X, 귀국도 늦음
- 하지 중장 좌익 불법규정, 좌익의 지하화
- 좌우합작(미군정도 표면적으로 표명, 지지X)
- 좌우합작 실패, 중도파 몰락, 여운형 피살
- 이승만 단정운동 극렬, 분단 정부 수립 몰두
- 김구의 국제정세관 부족, 권력투쟁의 기술X
- 김구 1949.06.26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함
- 1946. 좌익약화>조선공산당해산>남조선노동당 창설
- 미군정은 김규식을 남한 지도자로 추대하려함.
- 미군정은 이승만의 완고한 독선을 혐오함.
- 남한내 좌익은 우파와 단정수립 저지위해 2.7구국투쟁, 4.3사건 주도
- 남로당의 무력투쟁은 한국전쟁 이전에 모두 토벌됨
- 정부수립 후 이승만 북진통일 주장
- 미국은 이승만 경계, 군사 및 경제원조 삭감
- 이승만의 정치적 위기, 미국에게 골치 아픈 존재
- 북한의 군사력과 일본군과의 전투 경험한 연안파, 김일성의 게릴라 부대 경험
- 애치슨라인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
- 북한 전쟁 준비, 군사보충, 무기증강, 국경지역 소거, 대외적 평화공세
- 1950.06.25 북한의 전면적인 남한 침략
- 남한의 좌익세력이 동조하여 남한 장악할 것으로 오판(박헌영)
- 분단의 책임: 궁극적으로 미/소의 분할 점령에서 비롯됨.
- 특히 분할 점령을 주장한 미국의 책임이 좀 더 크다 봄
- 국내 지도자들의 자질 부족도 분단 책임 일부
- 대중의 정치적 미성숙도 분단 책임 일부




<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민주주의 도입>
- 1948.5.10 총선, 1948.08.15 정부 출범.
- 헌법학자 유진오 헌법 초안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로
- 이승만이 대통령책임제로 변경
- 이승만은 일제와 미군정에게 물려받은 경찰과 관료기구를 장악
- 이승만의 친일 관리 존속
- 이승만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(반민특위)를 무력해산함.
- 이승만의 농지개혁 유상매입 유상분배
- 결과적으로 지주의 농지 과점 해소
- 국가에 도전할 지주세력 소멸, 이승만의 정권 강화
- 이승만 정권의 성격: 자신의 정권 획득과 유지 위해 판단, 행동, 권위주의적.
- 이승만이 반민특위 해산하여 친일 경찰과 관료를 자기편화함.
- 농지개혁으로 농촌에서 한민당 지지 약화시킴.
- 1952. 부산정치파동, 이승만은 반대파 국회의원을 강제 억류
- 1951.12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
- 발췌개헌 -> 1952 대통령 선거에서 74.6% 압도적 득표로 재선
- 1954. 제3대 총선에서 조직적 개입, 관권개입, 압도적 승리
- 1954 사사오입개헌 대통령 중임을 3선으로 바꾸는 것이 골자
- 국회의원 재적 2/3에 해당하는 136표, 그러나 135표 개헌에 찬성
- 결국 사사오입 논리로 밀어붙여 결정을 번복시키고, 통과시킴.
- 신익희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다. 돌연 사망하다.
- 부통령 선거에서 예상밖으로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승리하다
- 1959. 정부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폐간시키다.
- 1960. 3.15부정선거(기표용지 사전투입, 기표감시, 매표행위, 조직폭력배, 내무부 공무원 동원), 결국 4대 대통령 이승만, 부통령 이기붕이 당선
- 국민들의 잠재된 불만이 폭발, 대규모 시위
-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사주로 각색하려함.
- 대구 등 지방도시에서부터 시위 거세짐
- 1960.04.18 고려대 시위학생 무차별 구타
- 경찰이 경무대로 가는 시위대에 총을 쏘다.
- 먼저 학생과 교수가 나서고, 결국 시민들이 나서서 이승만을 규탄함.
- 내각이 책임지는 형태로 물러났으나 시위는 사그리지 않음.
- 결국 이승만 하야 성명을 발표.




<4.19와 민주주의의 시련>
- 4.19의 성격과 쟁점.
- 대학생의 숫자 증가 정치의식 제고, 기성세대의 무능과 부패 목격, 사회정치 지도자에 대한 불신, 민주주의 수호 의지 강함
- 이승만은 경찰 동원 시위대를 폭력진압.
- 1960.04.11 최루탄이 눈에 박힌 고교생 김주열의 시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다.
- 1960.04.19 대규모 시위. 정권 퇴진 요구(4.19)
- 역사상 최초로 국민 대중이 통치권력을 쓰러뜨린 사건.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바탕을 제공
- 민주당의 어부지리 정권 획득, 사회통제 불능, 군부통제 불능
- 민주당 비상개헌 혁명재판소, 소급입법 제정, 구질서 관련자 처벌
- 1960.11. 민족통일연맹(서울대), 한국보통선거주장, 남북학생회담제의
- 1960.04. 군부쿠데타 풍문이 일다. 4월 위기설
- 1961.03 국토건설사업(5개년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으로 확대 예정)
- 대통령 윤보선, 장면 총리
- 장면의 지도력 부재
- 민주당 정부는 군 정화 운동을 지지한 최경록 해임,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됨.
- 1961. 봄부터 장면은 군부 쿠데타 정보와 보고 있었으나 무시함.




<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탄생과 변모>
- 1961.5.16 쿠데타 박정희 군부정권이 열리다
- 1950년대 이후로 군부의 팽창
- 미국, 서구의 제도와 기술유입, 엘리트 집단. 사회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신
- 이승만의 군대 이용, 장성들과 후원-피후원의 관계, 군정화 활동 실패
- 군사령관과 대통령, 총리 등은 쿠데타 움직임을 알았으나 대응않음, 무능.
- 쿠데타 성공 이후 군으로 복귀 않음.
- 쿠데타 이후 참여 장교들은 자신들이 군복을 벗고 청치에 나섬.
- 1963.12 군 쿠데타 세력은 민정을 이양함(유사 민간 정권으로 규정).
- 쿠데타 주역들은 민정이양 전에 국가재건최고회의, 중앙정보부 창설
- 쿠데타의 계획과 주도한 사람은 김종필
- 쿠데타 세력의 권력투쟁 최종 승자는 박정희
- 1963.10 대통령 선거, 제3공화국 도래
- 중앙정보부와 민주공화당(김종필이 1963년 창당) 조직들이 사회, 정치적 통제력을 확보
- 쿠데타 집권 세력은 부족한 정치적 정당성과 행정, 기술상의 전문성을 민간 지식인과 전문가들을 기용하여 보충함.
- 중정(중앙정보부)은 당, 국가기구, 민간 사찰, 불법납치, 고문, 공포정치의 상징.
- 박정희는 통치의 기간 동안 군을 효율적으로 장악함.
-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관심.
- 박정희 정권시절 고도의 경제적 성장
- 1970년대 들어서며 성장위주의 국가정책의 폐해 나타남(계급간, 지역간 불평등 심화, 극심한 이촌향도 현상, 경제성장 자체의 한계 + 국제적 경기침체)
- 1965 한일 국교 정상화 - 극렬한 반대에도 관철됨.
- 1964 한일회담 반대 시위 (6.3 사태)-졸속처리, 국회의 날치기 비준.
- 베트남전쟁(1955~1975)에 한국군이 참전(참전기간 1965~1973, 누계 30만명 참전), 불의한 침략 전쟁에 용병처럼 참전, 전쟁범죄 문제 있었고, 많은 청년들의 희생이 있었음), 얻은 것은 미국의 경제적 원조와 군사적 원조 강화.
- 박정희의 김종필 견제. 김종필 견제 위해 4인방(김성곤, 길재호, 김진만, 백남억) 세력 키웠다가 숙청해버림. 이후락과 김형욱을 이용하여 견제하였고, 다시 해임함. 고전적 분할지배 방식으로 잠재적 도전세력들을 모두 제거함.
- 3선 개헌, 김종필을 당 의장직에서 축출해버리고 3선 개헌 의지 관철
- 1967.02 유진오를 당수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한 신민당으로 통합.
- 1971년 김대중이 김영삼을 누르고 대선 후보가 되나, 박정희에 패배.(부정선거 의혹)
- 1969 닉슨 독트린 :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맡아야 한다는 것.



<유신체제의 탄생과 소멸>
- 1970.11.13 전태일 분신 자살, 노동 소요 심해짐
- 국제정세의 변화와 권력연장의 욕구
- 1971.12.06 국가비상사태
- 1971.03 미군 제7사단 철수(닉슨 독트린 영향)
- 1972.07.4, 7.4 남북공동성명(자주, 평화, 민족대단결)
- 1972.10 유신체제
- 1972.12. 북한 사회주의 헌법 선포(김일성 유일체제)
- 1973.08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
- 1974.01 긴급조치 1호
- 정당정치의 축소, 대통령선출 임무: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
- 국회의석 1/3 대통령 임명. 유신정우회(유정회) 의원
- 1972.12.23 제8대 대통령으로 박정희 선출(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,578명중 2,577명 찬성
- 대외의 변화에 따른 대내적 안보중심 슬로건
- 남북한 대치 상황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지연시킨 대표적 사례
- 1973.6.23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(유엔 남북한 동시가입 추진), 하지만 한국의 김대중 납치 등을 일으키자 이를 구실로 남북한의 대화 중단됨
- 1970년대 땅굴 사건
- 1976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
- 박정희는 국가주의, 개인과 전체의 조화 중시하는 유기체적 국가론을 국민에게 주입.
- 박정희는 개인과 공동체의 합일, 충성을 강조하는 유교적 전통을 이용함.
- 박정희의 친재벌주의 정책, 수출 지향 산업화, 지배 체제의 견고함을 더해줌
- 재야세력의 성장, 노동과 지식인의 연계, 1970년대 인권운동의 핵심
- 1973년 서울대학교 문리대생 시위(직접적 항거)
-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,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천주교와 개신교의 반독재 인권 운동 전개
- 1974.12.25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, 재야 지식인 종교인, 구정치인으로 구성
- 1975.03 3월 자유 언론 실천 운동, 언론인 대량 해고, 동아일보 광고 금지 탄압
- 1976.03.1 김대중, 윤보선 등 지도자들이 민주구국선업 선포, 민주화 운동 활기
- 박동선 사건(한국정부의 사주로 미 의회 의원들에게 뇌물 준 사건)
- 1974 김영삼 야당 신민당 총재에 오르다. 강경투쟁, 1975.5 박정희와 회동, 강경노선 철회(박정희가 자기를 속인 것 같다고 술회함)
- 박정희 정권과 타협, 신민당의 정치적 존속 보장.
- 1979.05 김영삼 다시 신민당의 총재가 되다. 신민당 대정부 투쟁 본격화
- 도시의 중간계급은 산업노동자와 함께 성장했으나 정치적 침묵을 함.
- 1970년대 말 수출부진, 물가폭등, 외채급증, 무역수지 불균형, 경공업 경시, 소비재 품귀 등 경제문제 불거짐. 제2차 석유파동(1978~1980) 한국경제 어려워짐
- YH사건, YH무역 임금체불, 여공들의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(여공 1명 사망)
- 김염상 총재직 박탈
- 1979.10.16 부산, 마산, 창원 인접 지역으로 학생시위 전파
- 1979.10.18 부산에 계엄령 선포, 20일에는 마산, 창원에 위수령 발동
- 경호실장 차지철의 월권 및 시위 강경진압 주장
- 1979.10.26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 살해
- 유신 체제는 공포정치, 강제력 기반, 국민 대다수를 부의 분배에서 소외
- 일인지배 체제, 후계자X, 결과는 파국, 이승만과 비슷한 말로
- 김재규, 박정희 살해행위 관련 논쟁. 결과적으로 유신체제 종료에 결정적 작용




<군부의 재집권과 전두환 정권>
- 10.26 사건 직후 전국 계엄 선포,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
- 전두환의 반란, 보안사령부, 합동수사본부, 육사11기,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
- 전두환의 12.12 쿠데타, 군사반란
- 신군부는 정승화를 체포, 하극상
- 박정희 피살 후 유신헌법 의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최규하(국무총리)를 대통령 선출
- 민주세력의 분열, 김대중, 김영삼의 분열,
- 신군부의 권력쟁취 행동, 대학생 학생회 간부 검거령, 광주지역 학살 자행
- 김대중을 광주항쟁 주동자로 몰아 내란 기도협의 구속.
- 김염상 가택 연금(정계은퇴 선언 받아냄)
- 김종필, 이후락, 박종규 등 구 여권 인사들 부정축재 협의로 공직에서 축출
- 과외금지, 정기간행물 등록취소, 불량배 소탕 핑계로 3만명 삼청교육대로 보냄
- 1980.08.16 최규하 대통령 하야.
- 1980.08 전두환은 초고속 승진으로 대장의 지위에 있었음.
- 1980.08 전두환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로 11대 대통령에 당선.
- 1980.09.17 김대중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,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
- 중앙정보부 약화, 국가안전기획부(안기부)로 개칭
- 선거인단으로 이러진 간접선거(이른바 체육관 선거),
- 대통령은 국회해산권 가짐. 국회는 내각불신임권, 국회 2/3는 지역구, 1/3은 전국구 선출, 대통령 임기는 7년 단임제
- 신군부 세력의 정권 장악.
- 1981.3.3 전두환 12대 대통령으로 취임.
- 1980-1983 억압적 통치
- 1983~ 유화정책
-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격해짐
- 1984 전국학생총연합(전학련)과 그 전위조직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(삼민투)가 주도 1984.11 민정당사 점검, 1985.05 서울 미국 문화원 점검
- 1986.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 투쟁위원회(민민투), 반미자주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(자민투)로 대체 되며 더욱 과격해짐.
- PD(민중민주주의. People's Democracy)파와 NL(민족해방. National Liberation)파의 모태가 됨
- 1986.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(애학투) 발족, 건국대 사태(26개 대학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철야 농성, 경찰은 1200명 이상의 농성학생 전원을 연행. 시위진압의 대규모성, 폭력성으로 사회적 충격을 줌)
- 1985.01.18 민주화추진협의회(민추협) 모체로 하여 신한민주당(신민당) 창설
- 1985.02 김대중 미국에서 국내로 복귀
-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.
- 1986.02.12 1천만 개헌운동 시작, 장외 정치 전환
- 1986.06 개헌내용 협의, 이민우 총재는 민주화 조치(양심수 석방, 언론자유 보장, 김대중 복권 등 7개 항) 수용 조건으로 타협안 발표
- 전두환은 1987.04.13 호헌조치로 대응
- 김대중 가택연금, 야당 의원 구속, 폭력배 동원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
- 1987.05.1 통일민주당 창당
- 1987.05.18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(1987.01 사망,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폭로)
- 1987.06 전국적 시위 발생(국민적 민주화 요구)
- 1987.06.29 노태우 6.29 선언: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
- 1987.10 헌법개정안 국민투표 통과, 주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, 5년 단임제
- 1987 김대중, 김영삼 경쟁.
- 1987.10 김대중 출마선언, 평화민주당 창당
- 민정당 노태우, 통일민주당 김영삼, 평화민주당 김대중,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의 4파전
- 1987. 지역주의 심화, 박정희 정권의 지역감정의 유발, 편가르기에서 비롯됨.
- 노태우 36.6% 득표 1위, 대통령 당선





<노태우 정부와 민주주의의 부활>
- 민주화 과도기 정부 성격
- 지배세력의 성격은 이전과 같음.
- 보수적 정치성격
- 노태우 정권 시절, 노동운동의 폭발적 증가
- 1990.01. 전국노동조합협의회(전노협) 결성(현실 변혁 통한 노동해방이 목표)
- 대대적인 노동운동의 결과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 조건이 크게 향상
- 문익환 목사의 북한 밀입국, 정부는 강경 노선으로 전환
- 1991.04. 강경대 피살사건(사복 경찰관이 폭행)
- 1990년대 학생운동의 과격성. 국민적 지지 잃음.
- 1990년대 중반이후 학생운도 급격히 쇠퇴.
- "총체적 위기" 1990년 현대중공업 파업사태 이후 사용한 용어
- 1990년대는 민주주의 보다는 안정을 원하는 시류가 정착, 대중이 묵종하기 시작함.
- 1990년대의 사람들은 결국 이념(민주주의) 보다는 안정(사회, 경제적)을 선택함.
- 87년 체제(국회의원 소선거구제, 전국구 의원제) 1987년
- 헌법재판소 생겨남
- 지역주의 만연, 지역 패거리 붕당 정치 정착,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
- 3당 합당. 집권 민정당+통일민주당(김영삼)+신공화당(김종필) 합당 218석 거대 여당(민자당)으로 거듭남(김영삼의 대권욕, 김종필의 권력욕이 합쳐진 결과물).
- 보수 세력의 연합 성격 보다는 권력 장악을 위한 동상이몽의 결과
- 민자당 권력투쟁에서 김영삼의 승리, 대권주자로서 당내 권력의 공고화





<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; 민주화의 진전과 지역 붕당 체제>
-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자당 후대 김영삼 42.0% 득표율로 당선
- 김영삼 정부 군개혁, 하나회 해체
- 노태우, 전두환 구속 수감.
- 김영삼 정부는 선거법 개정, 정치자금법 개정, 지방자치법 개정에 노력
- 언론 표현의 자유 확대, 인권 신장에 많은 발전
- 정주영의 국민당 해체
- 김종필의 소외, 민자당 탈당.
- 김종필 자유민주연합(자민련) 창당
- 1995.06.27 지방선거 민자당  참패, 민주당의 선전, 김대중의 정계 복귀
-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(국민회의) 창당
- 민자당, 국민회의, 자민련의 3당 체제, 3강 구도
- 1996.02 민자당의 5, 6공 인사들과 단절하고 민주계 중심으로 신한국당으로 개칭
- 1996.04.11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 당파 정치로 전락.
- 지역분할구도 선명해짐. 신한국당은 전라 충청권에서 거의 전멸,
- 국민회의는 거의 완전한 호남당으로 전락함.
- 김영삼 정부 민간화 완성, 금융실명제 실시
- 1993.12 우루과이 라운드 파동(쌀 개방 문제, 야당과 농민의 반발)
-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의 권력남용 사건
- 1997년 외환위기, 국민들에게 고통, 김영삼 정부의 몰락 재촉
- 김영삼은 1994년 세계화 논리로 신자유주의적 재벌 위주 정책의 이념적 도구로 제시
- 외환위기와 경제 혼란의 원인 제공, 빈부격차 확대 등 문제 발생
- 1997.12 김대중이 김종필과 연합하여 이회창을 간신히 누르고 대통령 당선됨.
- DJP 연합, 이인제 독자출마, 김영삼과 이회창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
- 야당에 의한 최초의 평화적 민주적 정권 교체
- 민주주의의 공고화 시기
- 지역패권의 이동(영남 인사 -> 호남 인사), 지역주의의 심화로 보기도 함.
- 지역감정 '한풀이' 로도 봄.
- 조선일보의 대 정부 공격 본격화
- 김대중 정부는 여소야대, 자민련과 연합의 정권.
-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려 했으나 야당의 거센 반발.
- 의원 꾸어 주기 전략 시행(자민련에 의원(의석)의 당적을 이적시킴)
- 남북관계 개선위한 '햇볕정책'
- 2000.06.15 남북공동선언
- 김대중 정부 시절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힘이 어느 정도 균형 잡는 상황
- 국가와 시민 사회의 다층적인 대결 또는 협력 구도로 변모
- 각종 시민운동 활성화(환경운동연합, 경제적의실천시민연합,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등 시민단체 활동 활발
-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시민단체들은 낙천, 낙선운동으로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력 증명
- 이익단체의 영향력 증대(2000년 의약분업 사태, 2003년 부안 방사능 폐기장 사태, 2004년 한-칠레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싼 농민들의 저항)
- 김영삼 정권 시절, 초기의 전향적 노사정책에서 노골적 친재벌 정책으로 돌아섬(1993 현대 파업 장기화 영향)
- 1998년 노사정위원회 설치
- 1999.01. 전국교직원노동조합(전교조) 합법화 법안 국회 통과
- 김대중 정부 신자유주의+사회적 복지 절충형
- 국제통화기금(IMF) 권고 받아들여 자본시장 개방, 기업 구조조정, 대량 해고, 공공 부문 민영화 추진
- 김영삼 정부의 재벌개혁 실패 원인: 정부의 의지 부족, 정경의 밀착 관계
- 한보사태: 한보그룹이 여야정치인들에게 대규모 뇌물 공여, 한보 부도, 경제위기의 한 원인 제공(IMF)
- 김대중 정부도 IMF의 신자유주의 개방 요구 전적 수용, 경제위기 극복했으나 부작용 심각
- 김대중 정부의 경제 부작용: 외국 자본에 대한 한국경제 종속, 재벌의 경제 지배, 빈부격차 심화, 재벌의 영향력 증대, 자본에 대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약화, 독점 재벌과 고위 관료, 정치인 전문인들의 인맥과 이익 카르텔 지배 심화

<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과 후퇴>
-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 탄생.
- 민주당의 국민 참여 경선제, 열세의 노무현이 젊은 층의 지지를 업고 대세
- 노무현-정몽준과 단일화, 선거직전 정몽준의 이탈(번복)
- 노무현 48.9% vs 이회장 46.6%, 노무현의 당선
- 이회창 아들 병역 관련 문제, 대중적 호소력 부족 등
- 노무현 정부, 3김 정치 종식.
- 노무현 민주당을 나와 열린우리당을 만들다(2002.11.11 창당)
- 노무현의 정치적 권위와 지도력 부족, 기성 지배계층(정·경제, 고위관료 등의 반발)
- 20-30대 젊은 층의 취향, 정서 대변, 젊은 도시 지식층의 탈권위주의 정서에 부응하면서 선풍을 일으킴.
- 진보 정당 원내 진출(2004년 제17대 총선, 민주노동당 10석)
- 노무현 정부는 과거 청산 개혁 시도. 반발 권위주의 잔존, 친일 청산도 기득권층의 이해가 걸려있어 쉽지 않음
- 노무현 정부의 과거 청산 개혁의 시도는 실패.
- 국회의원 선거 방식 변화(소선거구제+비례대표제), 지역구 1표, 비례대표(정당명부식)1표.
- 정당들의 상향식 공천을 제도화(기존의 하향식 공천, 공천권을 둘러싼 권력문제, 전략공천 등 아직도 공천의 문제는 남아 있다)
- 2004년 17대 총선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여부 둘러싼 당파 싸움.
- 한나라당의 대통령 탄핵안.
- 헌법재판소의 거부권 행사로 무위
- 한나라당은 국민의 비난을 자초.
- 열린우리당은 김대중의 개인 정당에 가까웠던 호남 기반의 민주당 세력과 단절, 3김 정치의 청산.(지역주의 보스 패거리 정치 청산)
-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종료와 함께 열린우리당은 자연히 소멸
- 노무현 정부 핵심 추진 과제(지역주의 타파, 과거사 청산, 권위 해체, 언로 바로세우기), 하지만 성과 내지 못함.
- 운동권 정치인과 기득권층의 대결, 기득권층의 거센 도전을 막아내지 못함.
- 사회경제적으로는 한미자유무역협정 앞장서 추진, 친기업 정책 등 신자유주의 계승.
- 사회적 양극화 부추김. 당시 비정규직과 신용불량자 급증
- 하지만 이런 행위들이 반대 세력을 당혹케 하고 반감을 약화 시키기도 함.
- 당시 노무현 정부는 좌파로 공격받았으나, 세계 보편적 기준에 의하면 오히려 우파에 가까움.
- (노무현 정권이 좌파, 우파 보다는 국정의 운영을 실리 중심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지로 보아도 되나 저자-김영명은 좌우의 논리만 파악).
- 기득권층의 반발. 노무현은 그들의 기준으로 비주류(고졸, 시민의 지지)의 지배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함.
- 386세대: 1990년대 후반 당시 30대, 1960년대 출생자, 1980년대 대학학번의 고학력 청년층을 의미(전두환 정권 반정부 민주화 투쟁, 대체로 중산층 사무직, 전문직, 비교적 진보적, 탈권위적 성향)
- 노무현 정권 말기 경기 악화. 부동산 가격 급등, 사회적 양극화
- 2007.12 제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에 대한 '묻지 마' 투표 현상. 이명박 당선
- 이명박 48% vs 정동영 26%
- 이명박, 보수 정권으로 회귀하다.
- 보수기득권층의 끊임없는 노무현 정부 때리기
- 경제상황의 악화에서 이명박은 경제살리기를 외치고 나와서 당선되다.
- 이명박의 각종 비리와 도덕성 결여, 투표결과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.
- 정치에 질린 시민들이 이명박을 당선시킴.
-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 편향, 사회적 양극화 심화
- '소통 부재'는 이명박 정권의 비판 핵심어
- 이명박의 언론장악(방송 등)
-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폭력적 진압
- 2008.05~06. 전경 버스로 "명박산성"을 두르다
- 언론 자유도 후퇴, 인권 탄압 악화 평가
- 사회 경제적 평등 매우 악화
-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적대 노선 표방
- 성과는 없고, 안보는 치명상
- 2010.03.26 천안함 피격
- 2010.11.23 연평도 포격 사건
-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적대 정책이 북한의 도발의 여건 조성에 기여했다는 평.
- 이명박 지도력의 부족, 건설회사 CEO 정도의 역할.
- (저자 김영명) 노무현과 이명박의 리더십 부족 비판.
- (저자 김영명) 노무현이 민생을 돌보지 못했다 봄.
- (저자 김영명) 이명박이 4대강 사업 같은 대규모 토건 사업에 매달려 시대 착오적인 개발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었다 봄.
- 저자 김영명은 노무현, 이명박 둘 다 타협의 미숙, 통합적 지도력 부재를 지적함.
- 보수세력과 지지자들은 실제 박정희의 독재를 경험하지 못하고, 과거의 향수만으로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음.
-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.
- 최순실이라는 일반인이 대통령의 배후에서 국정을 농단
- 박정희 향수와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.
- 촛불을 든 시민들, 문재인 정권이 탄생.

요약 끝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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